기본으로 돌아가 기본을 배우자. 쓰는 것보다 많이 벌면 되는 심플한 공식. 쓰는걸 줄이거나 버는걸 늘리면 되는 명확한 해법. 반성하고 기본부터 제대로 다시 배우자.

사람은 깊은 바닥에서 마주쳐봐야 진짜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한 번이라도 목격하게 되면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해 들리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오지 않는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모두 마찬가지다. 깊은 바닥에서 마주친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선(善)이었다면 사람들이 악(惡)이라 악을 써도 나에겐 선한 것이고, 내면이 악이었다면 겉으로 선이라 찬사를 받고 세상의 존경을 받아도 나에겐 악인 것이다. 미디어의 프레임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모습이 아닌, 충분히 속일 수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만들어낸 이미지’가 아닌, 진짜 그 사람을 알려면 남이 매개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잘 걸러서 보고 들어야 한다. 깊은 바닥까지 가보는 것이 가장 좋지만 모든 사람과 그러기는 쉽지 않으니, 무엇보다 항상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언론이든 SNS든 남의 이야기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에 대한 이야기도, 미디어나 사람을 통해 매개되었다면 반드시 걸러서 듣기를 바란다.

‘훌륭한 사장’이란 것이 똑똑한 몇 명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내가 이 일을 업(業)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본의 논리와 과거의 성공으로 인해 닿을 수 있는 어느 수준의 입지가 있다면, 고행으로만 닿을 수 있는 입지 또한 분명히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끝내 더 오래갔고 결국 더 큰 꿈을 이뤄왔음을 나는 계속 목격해왔다. 이 길이 고행과 경험을 통해서만 비로소 단단해질 수 있는 길임을 잘 알기에 나는 내가 겪어온 어려운 길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다.

스물, 그때로 돌아간다면 내 감정에 훨씬 솔직해졌으리라. 좋으면 좋다고 이야기했으리라. 대화가 통하는 아이에겐 더 친해지고 싶다고, 멋진 선배에겐 당신을 닮고 싶다고 다가가 이야기했으리라. 더 많은 선생님을 만났으리라. 나보다 먼저 똑같은 길을 걸었던 선배로서 그들의 경험을 하나라도 더 배웠으리라. 여행을 많이 다녔으리라. 그랬다면 내가 아는 세상 지평선이 지금보다 훨씬 넓어졌으리라. 사람들과는 더 깊은 추억을 만들었으리라. 아는 사람 잔뜩 만들 시간에, 친한 이들과 더 많이 보냈으리라. 영어를 공부했으리라. 세계와 연결되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꿈을 꿀 수 있었으리라. 인문학 책을 많이 보았으리라. 운동도 열심히 해 체력을 길렀으리라. 세상 모르고 놀았으리라. 일말의 후회가 없도록 놀았으리라. 내가 하려는 일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으리라. 직업이 아닌, 직급이 아닌, 내가 이루고 싶은 꿈, 그리고 그걸 위해 해야할 일들의 실체에 대해 심도있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으리라.

여러모로 스물이란 나이는 너무나 어설펐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모든 일에 서툴기 짝이 없는 나이. 그래서 또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이제 나의 스물이 간다. 여전히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모른 채로, 구멍 숭숭 뚫려 바람새고 물새는 채로 이렇게 떠밀려 나의 스물도 간다. 아뿔사, 졸업이다.

자정 넘어 녹초가 되어 집으로 들어와 습관처럼 TV를 켰는데 안나온다.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SK의 네트웍 장애. 무언가 스크린이 필요해 반사적으로 아이패드를 집어 들었더니 이것도 와이파이가 안돼 무용지물이다. 컴퓨터를 할 수도 없다. 책은 읽기 싫고 그냥 멍하니 소파에 앉아 핸드폰의 3G 네트웍을 보며 약간의 안도감을 느낀다. 네트웍이 끊기니 내가 집에서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 반성할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생각해볼 문제다. 앞으로의 가정에서는 더할 것이다. 지금 자라나는 디지털 네이티브들에게 off-line 상황은 엄청난 공포일지 모른다. 태어나서부터 거의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일테니. 생각해보니 노트북에 다운받아 놓은 드라마가 한 편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어찌보면 네트웍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새로 소비할 컨텐츠가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지 않나 싶다. 네트웍은 그 컨텐츠를 매개하는 수단이고. 그러고 보면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컨텐츠 네이티브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만약 off-contents 상황이 오면 그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사색을 하거나 책을 집어들 수 있을까? (물론 책도 좋은 컨텐츠지만 여기서는 좀 더 동적인 의미의 컨텐츠를 말하니까..) 컨텐츠 네이티브 세대의 수요를 충족하려면 앞으로는 지금보다 수십, 수백배는 많은 컨텐츠가 생산되어야 할 것이다. 관련 산업에 백년대계로 투자해 놓는 것은 어떨는지. ;-)

한정된 자원으로 좋은 서비스 만든다는 것, 이건 완전히 체력전이다. 정신은 또렷한데 몸이 못따라간다. 에고에고..

제품 중에는 회사 이름을 까먹는 제품이 있고 회사 이름을 높이는 제품이 있다. 우리가 타사 브랜드 앱을 만들거나 잠시 시간이 남아 가벼운 서비스 앱을 만들 때도 항상 높은 완성도를 지향해야만 나중에 진짜 서비스 앱을 낼 때 사람들이 우리 제품에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제품의 크기가 어떻든 간에 회사에서 나가는 제품이라면 응당 기획자는 쉬운 사용성 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하고, 디자이너는 예쁜 디자인, 그리고 개발자는 성능에 자기 이름을 걸 수 있어야 한다.

작은 제품이라고 대충하거나, 남의 이름으로 나가는 브랜드 앱이라고 사용성이 명백히 위배되는 고객사의 요구에 도전할 수 없다면 서비스하는 회사로서 가치가 없다. 또한 완성도가 떨어지는 제품이 회사 이름을 달고 버젓이 시장에 유통된다면 그걸 담당했던 사람들은 자기 개인의 전문성과 회사의 이름에 직무유기를 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물론 회사가 합당한 사람을 뽑아서 그 자리에 앉혀야 하고 부족하다면 교육을 통해 실력과 마인드를 프로 수준으로 올려 놓아야 하겠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의 반성과 학습이라고 하겠다.

부족한 채로 출시된 제품에 대한 심각한 부끄러움이 있어야 개인이 성장한다. 출시했다는 사실 자체에 기뻐하고 마는 사람은 아마추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요즘은 중고생도 일주일만 뚝딱해서 앱을 내는 시대다. 앱스토어 출시 자체가 기쁜 것이 아니라, 이 바닥에서 자기 전문성 가지고 돈 받으며 일하는 ‘프로’들이 과연 프로다운 앱을 냈느냐 하는 것에 깊은 자기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비스 회사에서 또 하나 갖춰야할 것이 있다면 모든 멤버의 기획자화(化)다. 서비스를 만들 때 기획은 기획자만의 몫이 아니다. 기획자가 사용성을 엉터리같이 잡아오면 그걸 단호하게 거부하고 더 쉽게 바꿔주는 것이 디자이너의 몫이기도 하다. 그걸 ‘기획자의 일까지 왜 내가 해?’라고 한다면 그 디자이너는 단순히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만 남고 만다. 개발자 역시 기획, 디자인이 잡아온 사용성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당연히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단 하나의 제품을 만들며, 목표는 간단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쓰는 것’. 더 많은 사람이 쓰려면 공통된 가치는 단 하나밖에 없다. ‘쉬운 것’. 그러니 모든 멤버들이 하나같이 쉬운 사용성 하나에 대해 제품 개발의 전 과정에서 끊임없는 토론과 쟁명, 그리고 치열한 관철과 거부를 반복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내 손을 떠났다고 내 제품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런 마인드는 전형적인 하청업체 직원 마인드다. 좋은 서비스 DNA가 있는 회사는 심지어 남의 하청 일을 하더라도 거기에 철학을 담고 장인정신을 담는다. 그리고 그런 회사가 반드시 좋은 서비스를 만들고 좋은 고객사와 함께 계속 재밌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서비스 개발과 운영의 전 과정에 참여하는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 마케터, 운영인력들은 컨베이어 벨트 위의 공장 노동자가 아니다. 내 공정이 아닌 곳에서라도 ‘쉬운 사용성’이라는 가치에 조금이나마 문제가 될만한 것을 발견한다면 응당 참견을 해야 하고 서로 얼굴 붉히면서라도 싸워야 한다. 싸우는 이유는 좋은 제품을 위해서다.

만드는 사람들이 평화롭고 서로의 일에 무관심해서는 결코 좋은 제품은 나올 수 없다.

오늘은 진짜로 반성을 많이 했다. 운전하고 오는데 그냥 갑자기 옛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눈물이 왈칵했다. 그동안 보면은 얼마나 원망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과거 나에게 피해 입히고 나간 사람들을. 근데 그동안 내가 그들에게 입힌 상처나 잘못은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냥 내 입장만 생각하고 끊임없이 원망만 했다. 단 한 번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고 잔인한 경험이었었는데, 그래서 몇 년 동안 그저 원망만 하고 있었는데 오늘 문득 차를 타고 오다가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의 입장이 이해가 갔다.

A는 내가 자기 꿈을 함께 이뤄줄 훌륭한 파트너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섣불리 투자해 놓은 돈이 당연히 걱정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 돈을 잃을까봐 당연히 무엇이든 해야했을 것이다. B는 분명 자기는 그럴 의도가 없다고 이야기했는데도 그럴 의도가 있다고 매도되는 것이 억울했을 것이다. B를 따라 나간 멤버들은 인간적으로 살갑게 대하지도 않는 독방 속 어린 대표가 어딘가 못미더웠으리라. C는 능력도 없고 앞으로 나아질 가능성조차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리라. 당연히 그랬으리라. D는 오랫동안 열심히 회사를 지켜도 대표는 다른 일에 관심이 많거나 돈벌 궁리하지 않아 몹시 답답했으리라. 다른 직원들 챙기고 조직 추스리느라 힘들었으리라. E는 회사 나가도 연락 한번 하지 않는 내게 서운했으리라. 회사에 있을 때나 나가서나 묘한 거리감에 불편했으리라.

참 다들 여러모로 서툰 대표라는 생각을 했으리라. 너무 고평가된 대표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으리라. 아직 미완의, 너무나 미완의 부족한 대표 밑에서 얼마간이든 시간을 쓴 자신들이 슬퍼졌으리라..

왜 이 많은 생각들이 갑자기 운전하다 문득 들게 되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부족한 나의 지금보다도 훨씬 더 미숙한 시절에 대한 한스러움, 그리고 생각해보면 참 열정적이고 회사를 사랑했던 이들에 대한 죄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다. 그들이 나에게, 그리고 회사에게, 동료들에게 종종 못할 짓을 했지만 그건 결국 다 나 때문이었다. 그들이 믿고 들어왔고, 계속 바라보았던, 그러나 기대에 못미쳤던, 고집과 귀찮음만 가득차 있던 나 때문이었다.

이제와 다시 그 모든 잘못된 관계를 되돌려 놓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이제 그들을 원망하는 것은 그만해야겠다. 돌이켜보면 그저 모두가 서로에 대한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나는 그들을 원망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때보다 약간은 더 쓸만해진 나는 이제 서로 믿고 꿈꾸며 좋은 제품 만들고 있는 소중한 팀과 함께하고 있다. 위의 ABCDE가 없었다면 아마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거나 또는 만났어도 또 다른 ABCDE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인연들이다. 앞으로는 절대로 잃지 않겠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